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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정광수의 ‘창극조 대춘향가’(1954년 발간)본명은 정용훈(丁榕薰), 호는 양암(亮菴)이다.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판소리명창이다. 김창환, 유성준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으며, '수궁가'와 '흥보가'에 능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이다. 1909년 9월 12일 전남 나주시 공산면 복용리 신동산마을에서 출생했다. 조선조 판소리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손자. 1925년 16세에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현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에서 김창환 명창과 아들 김봉학에게 판소리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진주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는데, 유성준의 적벽가는 삼고초려가 없는 민적벽가이므로 이 부분은 1940년에 이동백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또한 1940년 보성에서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30대 이전에는 주로 학습과 독공을 하였고, 1943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동일창극단에서 활동을 하였다. 1939년 6월 빅타 레코드에서 적벽가 새타령을 취입하였다. 1946년부터 1960대 초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예기권번, 광주국악원, 서동민속예술학원, 삼남국악원 등에서 소리선생을 역임했다. 1954년에는 광주에서 한덕수와 함께 창극조 대춘향가 사설집을 발간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정정렬 제 사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소리선생으로서 교재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4년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를 지정할 때, ‘지자군(持字軍) 대목(방자 편지 가져가는 데)’의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판소리 지정제도 개편 시에는 유성준 제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6년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기록사업의 일환으로 수궁가(처음∼토끼 배 가르는데)를 녹음하였고, 1991년 뿌리깊은나무에서도 수궁가 완창(3LP)을 취입하였는데 이 녹음은 오선보로 채보되어 있다. 1986년에는 자신의 판소리 5바탕 사설을 정리한 전통문화오가사전집을 출판하였다. 정광수는 김창환의 서편제 계열의 소리로 입문하였고, 나중에 유성준의 동편제 계열의 소리를 학습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동·서편제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긴장감 있는 성음을 구사하면서도 부침새가 정교하고 화려하여 어려운 소리라는 평을 받았으며, 또한 기품 있는 너름새를 구사하여 ‘조선조 광대의 너름새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유성준 제 수궁가 전승에 크게 기여하여 김영자·안숙선·정의진·정옥향 등 여러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2003년 11월 2일 향년 94세로 작고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1995년 동리대상,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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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만 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한성준,1941년) 1941년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이(爾)>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이(爾)>의 지은이 김태웅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圓覺社)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년 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월 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명창들이 백칠십 여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다.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시기와 관련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띤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즉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동·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가 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무안출신 강용환 국악명가 일명 강윤학 3대 국악명가라고 한다. 강윤학은 친척 강백천과 교우하며 남원 운봉 박만순에게 소리를 배운다. 아들 강용환(강용안이라고도 함, 1866~1938)은 정정열, 이동백과 교유했다. 어전광대(왕 앞에서 판소리하는 이)다. 의친왕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창극의 창시자로도 불린다. 강용환의 아들 강태홍(1891~1957)은 경주권번, 달성권번 등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를 창시했다. 부산지역 제자로 원옥화, 강남원, 박차경, 김춘지(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신명숙(부산시 무형문화재) 등이 있다. 강남중(1900~1972)은 숙부 강용환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오태석, 송만갑, 정정열 등을 사사했다. 일본에서 창극을 할 때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하여 고문을 당해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범 김구에게 오현(悟峴)이라는 호를 받는 등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이외에도 강준안, 강태종 등 명인이 있다. 아쉽게도 강용환 사진자료 등이 전무하다.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에서 관련 창극 '명인의 봄'을 초연한 바 있다. 강윤학 집안의 3대 명인들을 모태로 출발 한 것이 무안 군립국악원이다. 현재는 3명의 상임단원과 6명의 비상임 단원뿐이지만 더 큰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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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제·서편제 아우른 '선비 명창'정광수 명인은 본명은 정용훈(丁榕薰)이고, 호는 양암(亮菴)이다.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판소리명창. 김창환, 유성준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으며, 수궁가와 흥보가에 능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이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국창(國唱)으로 불렸던 조선조 말 명창 정창업의 손자로 15세에 명창 김창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이동백에게 적벽가를 각각 배웠다. 창극 운동에도 참여하다가 광복 이후 광주에서 삼남국악원을 설립해 제자를 양성해 왔고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됐다.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지난해에도 국립국악원에서 공연을 갖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1909년 9월 12일 전남 나주시 공산면 복용리 신동산마을에서 출생. 본명 용훈(榕薰), 호 양암(亮菴). 조선조 판소리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손자. 1925년 16세에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현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에서 김창환 명창과 아들 김봉학에게 판소리 「춘향가」·「흥보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진주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는데, 유성준의 「적벽가」는 삼고초려가 없는 「민적벽가」이므로 이 부분은 1940년에 이동백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또한 1940년 보성에서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30대 이전에는 주로 학습과 독공을 하였고, 1943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동일창극단에서 활동을 하였다. 1939년 6월 빅타 레코드에서 「적벽가」 ‘새타령’을 취입하였다. 1946년부터 1960대 초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예기권번, 광주국악원, 서동민속예술학원, 삼남국악원 등에서 소리선생을 역임했다. 1954년에는 광주에서 한덕수와 함께 『창극조 대춘향가』사설집을 발간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정정렬 제 사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소리선생으로서 교재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4년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를 지정할 때, ‘지자군(持字軍) 대목(방자 편지 가져가는 데)’의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판소리 지정제도 개편 시에는 유성준 제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6년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기록사업의 일환으로 「수궁가」(처음∼토끼 배 가르는데)를 녹음하였고, 1991년 뿌리깊은나무에서도 「수궁가」 완창(3LP)을 취입하였는데 이 녹음은 오선보로 채보되어 있다. 1986년에는 자신의 판소리 5바탕 사설을 정리한 『전통문화오가사전집』을 출판하였다. 판소리 양대 산맥인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예인(藝人)이었다. 많은 국악인들은 우리 소리의 예스런 본디 모습(고제·古制)을 온전히 간직했던 큰 소리꾼이 갔다고 입을 모은다. "한학에도 밝아 ‘선비 명창’으로 통한 정 명창이 무대에 나서면 태(態)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소리라도 엥겨 멋진 발림(손짓 몸짓)을 할라치면 그런 가경(佳景)이 없는데 이를 영 만나볼 수 없게 됐다”고 이보형씨(문화재전문위원)는 애도했다. 정 명창은 일제 때 대동가극단·동일창극단 창극무대를 누비다 광복 후 광주에서 광주국악원을 창설,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64년 판소리 ‘춘향가’로 우리나라 최초 무형문화재의 한 사람이 됐고,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수궁가’ 보유자가 됐다. 82세 때 ‘수궁가’ 음반을 냈고 아흔을 넘긴 고령에도 국악로보존회 무대 등을 지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지난달 29일에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악화로 딸 의진씨가 대신 무대에 섰다. 정 명창은 판소리 사설집을 정리한 ‘전통문화 오가사집’ 등 저서를 남겼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 문화훈장)과 KBS 국악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전통문화 오가사전집’이 있다. 유족으로 아들 은석씨 등 1남2녀가 있다. 정광수는 김창환의 서편제 계열의 소리로 입문하였고, 나중에 유성준의 동편제 계열의 소리를 학습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동·서편제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긴장감 있는 성음을 구사하면서도 부침새가 정교하고 화려하여 어려운 소리라는 평을 받았으며, 또한 기품 있는 너름새를 구사하여 ‘조선조 광대의 너름새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유성준 제 「수궁가」 전승에 크게 기여하여 김영자·안숙선·정의진·정옥향 등 여러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2003년 11월 2일 향년 94세로 작고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1995년 동리대상,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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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현장성과 직설적인 화법의 통쾌한 남도인문학자 목포대 이윤선 선생의 칼럼이 연재된다. 새롭게 마련된 금요 고정칼럼 ‘이윤선의 현장성 있는 남도인문학’에서 남도 풍류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 만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 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 1941년 잡지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이(爾)'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이의 지은이 김태웅 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년 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월 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 명창이 백칠십여 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 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 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 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 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 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 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다.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 시기와 관련된 것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즉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 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 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동·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가 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 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 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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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흥보가) 보유자, 이옥천판소리는 서민예술의 하나로, 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반영시켜 노래한 창악이다. 판소리는 광대가 병충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나 공연장에서 고수의 북 반주로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긴 이야기를, 몸짓을 섞어 가며 흥미롭게 노래하는 판의 예술이다. 연행하는 형태로 보자면 음악극의 모습이기도 하며, 담고 있는 내용으로 보자면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여주는 서사극이기도 하다. '판'에서 이야기와 노래 및 연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의형태가 바로 판소리인 것이다. 판소리는 광대가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 나 공연장에서 고수의 북 반주로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긴 이야기를, 몸짓을 섞어가며 흥미롭게 노래하는 판의 예술이다. 연행하는 형태로 보자면 음악극의 모습이기도 하며, 담고 있는 내용으로 보자면 이야기를 연극으로 보여주는 서사극이기도 하다. ‘판’에서 이야기와 노래 및 연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의 형태가 바로 판소리 인 것이다. 판소리는 애초에 소리로 범칭되었으며, 타령(打令)・잡가(雜歌) ・ 광대소리 ・ 극가(劇歌 )・ 창극조(唱劇調) 등의 용어로도 통용되었다. 원래 판소리는 완강한 틀로 짜여 있기 때문에 쉽게 변화하지 않은 채 전승되는 특징이 있다.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2호 판소리(흥보가) 보유자 이옥천은 박녹주 명창에게서 동편제 〈흥보가〉를 온전히 전수받았으며, 이옥천의 성음은 박녹주 명창의 성음과 소리 특징을 닮았다. 박녹주 명창의 목구성의 특징인 통성과 감는목, 졸라떼는 목 등을 흡사하게 구사한다.이옥천 보유자는 박녹주〈흥보가〉의 탁월한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정확한 발음구사와 적절한 장단운용이 돋보이며, 발림이나 너름새가 우아하여 판에 어울리는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수궁가 보유자인 정의진은 어전 명창으로 통정대부의 벼슬을 하사받은 증조부인 정창업 명창과 조부인 정학진 명창에 이어 부친인 정광수 명창으로 이어지는 소리가문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부친에게 직접 소리를 전수 받아서 정광수 명창의 고제소리의 법통과 성음을 잘 이어받았으며, 정광수제 수궁가의 원형보존을 잘 하고 있으며 정광수 명창의 소리 특징을 거의 완벽하게 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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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영어: Pansori)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아니리(말), 너름새(몸짓-발림)을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페라임. ‘판소리’는 ‘판’과 ‘소리’의 합성어로 ‘소리’는 ‘음악’을 말하고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곳’ 또는 ‘상황과 장면’을 뜻하는 것으로 ‘많은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임. 광대가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를 펼친 마당이나 공연장에서 짧게는 세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 정도 걸리는 긴 이야기를 몸짓을 섞어가며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한국 전통음악의 하나임. 일정한 극적 내용을 광대 혼자 육성과 몸짓의 창극조로 한국 향토의 선율을 토대로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켜 연행하는 것. 판소리는 당초에 '소리'라는 범칭으로 불리었으며 타령, 잡가, 광대소리, 극가(劇歌). 창극조(唱劇調) 등의 용어로도 통용되고 있음. 1964년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11월 7일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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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수의 다이나믹 코리아 08월 24일⊙ 일시 : 2007년 08월 24일(금) 저녁7시30분 ⊙ 장소 : 포천반월아트홀 대극장 ⊙ 프로그램 일고화락 한국은 진정 '북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다양한 기운과 모양새를 지닌 수백의 장단들이 있으며, 여러 가지 가죽 악기들이 있다. 그 악기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자 특징은 악기의 면이 수직적으로 펼쳐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지극히 한국적인 울림이 탄생된다. '일고화락'은 한국의 다양한 가죽악기와 펼치는 장엄하고도 극적인 대향연이다. 판소리 판소리는 한국전통성악 중에서 가장 극적이고 긴 노래이다. 조선 중기 이후 남도지방 특유의 곡조를 토대로 발달하였으며, 광대 한 명이 고 수(鼓手) 한명의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육성(肉聲)과 몸짓을 곁들여 창극조(唱劇調)로 두서너 시간에 걸쳐 부르는 민속예술형태의 한 갈래이다. 장고춤 장고를 어깨에 비스듬히 둘러매고 여러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 호남농악의 우도굿 가운데 개인놀이에서 출발하였다. 오른손에 채를, 왼손에는 궁글채를 들고 여러 가지 리듬으로 변화시키며, 까치걸음이라는 독특한 걸음걸이로 가볍게 움직이고 뛰어 흥을 돋운다. 최근 새롭게 안무하며, 느린 장단으로 흥청거리며 춤을 추다가 빠른 장단의 장고가락을 구사하는 등 완전한 독립무로 발전, 정착하였다. 삼도농악가락 사물놀이는 꽹과리, 징, 장고, 북의 사물악기로 빚어내는 기운생동의 세계이다. 그리고 삼도농악가락은 세계인을 감동시킨 사물놀이의 대표곡이다. 하늘의 소리와 땅의 기운이 네 가지 악기를 통해 사람에게 전해지며, 한국인의 신명과 조화 그리고 역동성이 표출된다. 춘앵무 연대유함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이 이른 아침에 멀리서 들려오는 꾀꼬리가 우는 소리를 듣고 백명달에게 춘앵전을 작곡하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조선조 순조 때 효명세자가 숙황후 보경 40세를 경축하기 위하여 이름을 빌려 지은 향악정재이다. 이 춤은 화문석 위에서 느린 사위와 우아한 동작으로 추는데 그 생명이 있다. 판굿, 소고춤 판굿은 '사물놀이'의 백미이자, 상모를 돌리며 연주를 하는 모습은 한국의 공연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이기도 하다. 발로는 땅 을 박차고, 손으로는 악기를 연주하며, 온몸의 기운이 머리 끝에 닿아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상모짓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유일한 공연형태이다. 또한 설장고놀이, 소고놀이, 열두발 상모놀이의 역동적인 개인놀이에 이어 무용단의 신명나는 소 고춤이 판굿에 합류하여 공연의 대단원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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